02. 첫외출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파트 앞 초등학교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눈을 뜬다. 벌써 10시가 넘은 시간이다. 이미 아침신문은 도착했을 테고, 신문을 탐독하시는 부모들은 시험결과공시를 보았으리라. 어느 놈은 수석으로 합격했을 테고, 최연소 합격은 어린놈이, 최고령 합격은 어느 중 닭이 했겠지.  광렬은 그저 쥐죽은 듯 침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유구무언 아닌가?  어쨌든 이제 겨우 10월 초순이다.  내년 3월이나 되어야 4학년 1학기로 복학하게 될 테니 적어도 넉 달이 상의 공백이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무얼 한단 말인가?  아니 그때까지 누구와 시간을 보낸다는 말인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게 될 캠퍼스나, 섣부른 위로나 질책을 듣게 될 집안에 머물러 있기는 싫었다.

'당장 오늘은 어디를 나가서 시간을 때우나?'
이럴 때 나영이가 곁에 있었더라면….

깜빡 잊고 있었던 삐삐를 보니 밤새 얼마나 진동이 울렸는지, 배터리가 다 떨어져 있었다. 
이나영.
이나영.
이나영.
이나영.
이나영.
'헛, 이년 어제 전화도 불통이니 정말 답답해서 꼭지가 돌았었군.'

"야!"로 시작되는 나영의 메시지 들을 대여섯 개씩이나 중복해서 들을 것도 없이 차례로 지우고 나자, 작년에 이미 사시 2차 유예에 실패하고 이번 봄에는 아예 1차 시험에서부터 다시 어이없는 미역국을 마신 낙방 거사 선배, 성연이가 어젯밤 11시경 메시지를 남겼다.
"광렬아.  여기 영민이랑 재진이랑 모두 녹두에 다 모여있거든?  우리 여기서 새벽 늦게까지 마시다가, 영민이네 자취방으로 갈 테니까 와라.  알았지?  힘내!"
역시 고마운 친구들이다.  하지만, 지금 거기 가봤자 신세타령과 함께 밤샌 과음 후 떡이 된 녀석들의 지저분한 자취방 청소 밖에 더해주게 될까?

::::::::::::::::::::::::::

며칠간의 칩거를 마친 광렬은 그전에도 가끔 어울려 다니던 친구 녀석들과 빈곤한 B급 화류계 생활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한 달 후 열람한 과목별 점수를 알아보니 역시나 시간배분에 실패했던 그 한 과목에서 과락이 낙방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은 고시준비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아니 어찌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을 열고 대했던 나영이 자신을 그리 모질게 짓밟으며 떠나게 만든 건 다 비인간적인 행정고시 준비 탓이라는 나름대로 자기합리화를 통한 현실도피 생존법인지도 모르겠다.  재경부 김광렬 사무관에 대한 꿈이 거의 사라져 갈 즈음인 12월 초 어느 날, 친구들 중 가장 수단 좋고 발넓은 재준이 전화해 왔다.

1 어~이. 광렬아~  어떻게 지내냐?
+ 야~ 오랜만이다.  나야 머 그냥 집에서 뒹굴거리고, 가끔 쐬주나 마시러 나가지. 잘나가는 조재준은 어떻게 지냈냐?
1 잘나가긴 어디를 나간다고 그러냐.  지금도 집이다.  광렬아. 보고 싶다!
+ 어.. 나도.
광렬은 재준과 맞장구 치면서도, 애인 사이도 아닌 친구사이에, 그것도 술 한 잔 하지 않은 맨정신에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이 녀석은 언제나 넉살이 좋다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에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이 녀석은 분명 큰 사업가가 될 거라는 느낌이 왔다.
1 야 친구야. 너 정혜 알지?
+ 어? 무슨 정혜? 조정혜? 이정혜? 서정혜?
1 아니, 피아노 하는 한정혜.
+ 어~ 한정혜 알지. 나랑 예전에 좀 친했었지. 너는 어떻게 걔랑 연락이 되었어?
1 그러게. 엊그제 나이트 갔다가 부킹해서 만났는데, 서로 족보를 맞춰보다 보니까 정혜가 너를 알더라고. 너 아직 살아 있는지 안부도 묻더라.
+ 나이트? 거봐. 너 잘나가는 거 맞네!
1 하하. 나도 몇 년 만에 처음 간 거야. 그나저나 광렬아. 너 집에만 있지 말고, 크리스마스 직전 토요일에 창훈이 불러서, 정혜 친구들이랑 스케이트 타러 가지 않을래?
+ 스키도 아니고 무슨 스케이트?
1 어. 하이야트 JJ 옆에 있잖어. 거기 가자고.
+ 아…. 그래? 그런데 거기는 피겨스케이트라 뒤뚱뒤뚱 펭귄처럼.. 나는 별론데.. 나 운동하는 스포츠센터에서 보니까 요즘 영계들은 다 아이스하키용 스케이트 신더라구.
1 어이 광렬. 우리가 뭐 스케이트 타러 가냐? 오랜만에 창훈이랑 셋이서 술 한 잔 하자고 그러는 거지. 창훈이 걔는 모임에 일단 여자가 안 끼이면, 얼굴을 안 나타내는 녀석이잖냐. 정혜가 자기 예고 동기 두명 데려온 댔거든. 그날 봐서, 뭐 나오는 애들도 괜찮으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또 만날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거지.
+ 오케이 콜. 그럼 토요일에 가는 거로 하자.

::::::::::::::::::::

약속했던 토요일 오후가 되자, 광렬은 모처럼 한강 다리를 건너 시내로 나섰다.

몇 년 만에 처음 가져보는 낯선 여자애들과는 만남이라 별로 내키지는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휴학하고는 안본지 1년이 넘은 창훈이 녀석과의 익살스러운 술자리는 꽤나 즐거울 것 같았다.

붉은색과 초록색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한 남산의 하얏트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산만한 덩치의 재준이 양손을 반갑게 흔든다. 역시 첫눈에는 오렌지인 듯 보이지만 어느 정도 프롤레타리아스러운 구석도 있어서 광렬과 배짱이 잘 맞는 녀석은, 쓸데없는 돈을 아끼고자 음료수를 시켜야 하는 테이블에 앉지 않고 한쪽 구석 기둥에 기대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 야~ 재준아 오랜만이다. 칩(cheap)하게 서서 기다리는 건 여전하구나?
1 아이고 반갑다. 광렬아. 거. 시험은 잊어버려라. 사나희 김광렬이가 쩨쩨하게 과천에서 사무관이나 하고 앉아있으려 하냐? 우리 사대문 안에서 크게 놀아야지.
성큼성큼 걸어온 재준이 고시에서 떨어진 광렬을 껴안으며 위로의 말을 농스럽게 건넨다.
+ 하하. 사대문 안에서 놀아? 북창동이 사대문이지? 싫어 난 강남 텐프로에서 놀래.
1 어이 광렬. 너의 조크는 말이야. 언제나 신선하다니까.
+ 야. 저기 저 여자 오현경 아니니?
1 오~ 그러네. 오현경이네.
+ 가서 아는 척 한번 해볼까? 단대 다니던 나 아는 선배랑 친했다던데.
1 야~ 아서라. 어디 남자 만나러 왔겠지. 킥킥
+ 오케이. 하여간 오랜만에 오니까, 역시 물 좋은데? 정혜가 데려오는 친구들도 확실한 거야?
1 정혜가 엄선해서 온다고 했어. 정혜가 또 발은 넓잖냐.

마침 창훈이 세 여자들과 떠들며 호텔 정문을 들어온다.

+ 야 창훈아. 정혜야 너도 오랜만이다.
"광렬오빠! 그간 연락도 안 하고 어디 숨어 있었어요?"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정혜는 훨씬 성숙해 보인다.
+ 응. 내가 계룡산에서 도를 좀 닦았거든. 관상이나 손금 봐주랴?
"호호 정말요? 오빠. 여기 제 동창들. 여긴 이정현, 그리고 김혜수. 정현이는 기악과 바이올린 전공이고, 혜수는 작곡과예요."
1 야~ 여기 세 아가씨들은, 나중에 남편들이 실직해도 최소 밥은 안 굶기겠네요? 다들 레슨하고 반주하기 좋은 전공이네? 학원 차려도 되겠다.
사람좋은 재준이가 썰렁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운다.

"아이~ 학원 같은 거 하는 게 제일 싫어요. 우리 엄마가 아마 기절할 거야."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을 그녀에 어울리지 않게 환하지 않고 부자연스런 인상 탓에 방학마다 성형수술을 했을 것 같은 못난이 인형 이정현은 재준의 실없는 농담이 못마땅한지 바로 맞받아쳤다.  순간 눈살이 찌푸려진 광렬은 오랜만에 만나 친구들의 기분을 맞추고자 애써 웃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 걱정 마세요. 바이올린 학원은 어차피 잘 되지도 않아요. 꼭 하시려면, 아파트 집집이 돌면서 개인레슨이나 하러 다니셔야 할걸요?
은근히 느껴지는 그녀의 귀족 근성이 아니꼬웠던 광렬이 퉁명스레 내뱉은 말에 모임의 분위기가 잠시 썰렁해진다. 근래 광렬의 심사는 그렇게 뒤틀려 있었다. 

"오빠들 그런데 오늘 스케이트 자신 있어요?"
언제나 재치있는 정혜가 얼른 분위기를 수습한다.
"당근이지~ 내가 중학교 때 말이야. 제주도 대표로 전국체전에 나간 거 몰라? 오늘 확실히 보여줄게."
허풍이 좀 센, 서울 토박이 창훈이 녀석의 농담이 시작되었다.
"오빠. 그런데 얘들은 스케이트 못 탄다네요. 그래서 안타고 구경만 하겠데요."
"상관없어. 오늘 배우면 되지. 내가 예전에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초보자 강습 알바만 2년 한 거 몰라?"
창훈의 일일레슨 제안에 정혜의 친구들은 그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거절한다.
나영의 화려한 외모와는 비교도 되지 않으며, 왠지 끌리지 않는 성격일 것 같은 그녀들의 첫인상부터 흥미를 잃었던 광렬의 눈살이 다시 찌푸려진다.
'역시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들. 스케이트도 못 탈 거면, 도대체 뭐하러 스케이트장까지 따라나왔단 말인가? 못 타면 배우든지, 그것도 싫으면 그냥 집에 있던지.'

일행은 로비에서 호텔의 남쪽 정원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왔다.  광렬을 포함한 남자 셋과 정혜 한 명은 스케이트를 대여했고, 옷차림부터 스케이트랑은 거리가 먼 두 공주마마들은 아이스링크 밖에서 팔짱을 꼭 끼고 붙어 있다. 광렬은 그 둘이 아마 레즈비언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보기도 한다.

+ 얘들아~ 우리 술래 정해서 다방구 하자.
스케이트 끈을 동여매고 얼음판 위에 오른 정혜와 남자 셋은 흥이 났다. 특히 시험발표가 나고 나영과도 헤어진 후 지난 두 달간을 대치동 집과 컴컴한 술집 사이를 오가다가 양지 밖으로 첫 외출을 한 김광렬은 더욱 신이 나서 제안한다.
"그래요. 다방구!"
정혜도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

토요일 오후의 남산 하이야트 호텔 야외 스케이트장은 경쾌한 음악과 밝은 표정의 20.30대 남녀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아니 여자들이 훨씬 더 많은 명백한 여초(女超)지역이었다.

'지금쯤이면… 나도 컴컴한 도서관 입구에서 콜라빵이나, 탕수육빵 팩차기나 하고 있을 땐 데….'
텁수룩한 고시생들로 가득 찬 주말 저녁 도서관 풍경을 떠올리던 광렬은 다시 나영과의 마지막 전화통화를 기억해낸다.   

= 오빠가 나랑 스키장에 한번 같이 가줬어? 나 밤에 영어학원 끝날 때 한번 데리러 왔어? 희경이 남자친구처럼 리포트를 대신 써주거나, 아침에 집에서 학교까지 차를 태워준 적 있어? 에버랜드 장미축제, 튤립축제, 야간개장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빼고 마지막으로 데려간 게 도대체 언제야? 화이트데이라고 남들처럼 장미 백송이 꽃바구니를 제대로 한번 준비했어?


+ 나는…. 바. 뻤. 잔. 어.

좌우에 가득한 젊은 나영들을 바라보는 광렬은, 그녀가 주말이면 느꼈을 외로움과 소외감에 대해서 이제서야 조금 미안한 마음을 떠올렸다.
'맨날 영양 보충한다고 삼겹살만 같이 먹지 말고 이런 데 한번 데려올걸….'

그리 넓지 않은 아이스링크였지만 오랜만에 다시 유년시절로 돌아간 듯 깊게 몰입하여 다방구 놀이를 하다 보니, 온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광렬은 술래가 교체되는 틈을 타서 그동안 둘이 팔짱을 꼭 낀 채 아이스링크 밖 펜스에 기대서서 링크 안에서 스케이트를 타고있는 정혜와 세 남자를 부럽게 바라보고만 있는 정현과 혜수에게 다가갔다.
+ 너희들 정말 안 탈 거야?
"네."
내성적으로 보이는 정현이 대답했다.
+ 그래? 그럼 우리 타는 동안 여기 내 코트 좀 지키고 있을래?
광렬이 롱코트를 벗어 펜스에 걸치며 말했다.

"저.기.요?"
두터운 캐시미어 코트를 벗고 나서 한결 개운해진 광렬이 다시 스케이트 인파 속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
+ 어. 왜?
"초면인데 왜 반말이세요?"
나름대로 가냘픈 정현의 옆에 서서 여태껏 가만히 있던, 조금은 덩치 있는 혜수가 분한 듯한 표정으로 따진다. 스스로도 그녀 둘에게 별로 매너 있게 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광렬로서는 그다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왜 초면에 반말을 했냐는 질문에, '응 왜냐하면 말이지, 너희들은 첫인상부터 재수가 없었거든.' 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 어. 미안해. 내가 정혜를 신입생때부터 동생같이 알아서.  나는 또 너희들이 정혜친구들이라고 해서 그냥 그렇게 불렀네. 미안해…. 요.

몸을 돌린 광렬은 서둘러 스케이터들의 대열에 들어왔지만, 뒤통수가 따가웠다. 정혜 같았으면 그냥 좋게 넘어갔을 일을 꼭 짚어 따지고 드는 저 김혜수라는 아이는 틀림없이 부치(butch) 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팸(femme).정현과 부치(butch).혜수가 꽤나 잘 어울리는 레즈비언 커플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혼자 씨익 웃는다.

"오빠. 감기들면 어떡하려고?"
그리 능숙하지 않은 스케이트 동작으로 광렬에게 다가온 정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건넨 한마디다.
'아 이 얼마 만에 들어보는, 여자의 염려인가?'
+ 어. 스케이트 타니까 덥네. 근데, 재네들 나한테 열 받았어.
"어? 누구? 정현이하고 혜수?"
+ 응. 내가 반말로 내 옷 좀 지키라 그랬거든.
"호호. 왜 그랬어?"
+ 뭐 너처럼 편하게 대하려고 그런 거지.
"좀 잘하지. 오빠 쟤네 집이 누구네 집인지 알어?"
다시 광렬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 우리 집은 누구네 집인 줄 알어?
"어? 오.빠.네?  몰..라... 아무도 말 안 해주던데?"
순진한 정혜가 진짜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본다.
+ 누구네는 누구네야? 김광렬네 집이지. 하하하.
"호호호"
정혜가 친구들의 가정환경에 대해서 하려는 말이 대강 상상이 되던 광렬은, 이런 이슈를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는 분위기가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도 빠르고 언제나 상냥한 정혜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은 오늘따라 그동안 별다른 눈길을 준 적이 없었던 정혜가 유난히 예뻐 보인다.

+ 재준아! 창훈아! 이번엔 내가 술래 할 게!
재준과 창훈은 능숙하게 스케이트를 지쳐 쏜살처럼 도망갔고, 술래가 된 광렬은 자연스럽게도 제일 만만한 정혜의 뒤를 뒤쫓게 되었다. 광렬은 스케이트가 익숙하지 않아 검은 스타킹의 두 다리를 곧게 모으고 양팔을 쫙 펴고 가만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정혜의 뒷모습이 새삼스럽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쿵~"
+ 야! 정혜야!
초보자답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타던 정혜가 통나무처럼 그대로 머리부터 곧게 뒤로 넘어져 버렸고, 놀란 세 남자가 모여들었다.
1 아 유 올롸잇?
카투사를 다녀온 이후 유난히 영어를 자주 섞어 쓰는 재준이다.
+ 정혜야, 괜찮어? 너 스케이트 잘 못 타는구나?
"에이 조심하지?. 광렬이 너 너무 심하게 쫒아간 거 아냐?"
얼이 빠진 정혜가 한참을 정신 못 차리고 큰대자로 누워 있자, 세 남자들은 그녀를 부축해서 스케이트장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혜수와 정현이 뛰어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광렬이 존댓말을 하기 어색해서 머뭇거리는 사이, 창훈이 상황을 설명했고, 부치.김혜수는 광렬을 다시 노려본다.
모든게 네 탓이라는 듯.
머리를 감싸고 있던 정혜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고, 양볼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있다.
"저 괜찮아요."
그녀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 정혜야 정말 괜찮겠어? 그런데 어떻게 머리부터 넘어지냐?
"네. 그나마 오늘 후드 달린 패딩코트를 입어서 다행이에요. 모자가 없었더라면, 진짜 큰일 날뻔했겠죠?"

창훈과 재준은 입을 모아 정혜가 얼마나 씩씩한지 칭찬했고, 정현과 혜수는 정혜를 쓰다듬으며 병원을 가야 하는 건 아닌지, 왜 그리 심하게 스케이트를 탔는지 질책한다. 광렬은 그저 미안함에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듯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정혜가 코트를 벗은 그의 감기를 염려해주던 장면, 그의 퉁명스러운 농담에도 밝게 웃어주던 표정, 그리고 바로 전 머리를 감싸며 눈물 젖은 얼굴로도 억지로 괜찮다고 어른스럽게 말하던 장면들로 가득했다.
'그저 철없는 공주마마들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이런 면들도 있었구나.'

정혜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여섯 명은 일단 야외에 비닐과 천막으로 만들어진 간이주점으로 들어갔고 주문표를 찾아들었다.
+ 정혜야 정말 괜찮어? 병원 가볼래?
정혜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느낀 광렬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아뇨. 이렇게 좀 있으면 될 거 같아요. 저 원래 돌머리잖아요."
1 그러게. 아까 얼음이 많이 깨졌더라구.
익살맞은 재준이 농담을 더한다.
정현과 혜수는 재준이의 농담도 못마땅한 표정이다.

얼마 후 정혜의 컨디션을 이유로 여자 셋은 집으로 돌아갔고, 세 남자 녀석들은 저마다 정혜가 얼마나 씩씩한지 꼭 한번 사귀어 볼만한 여자인지에 대한 칭찬과, 서로 그녀와 한번 사귀어 보라는 우정어린 권면과, 나머지 두 공주들에 대한 악평을 늘어놓았다.
1 야. 그건 그렇고, 우리는 이제 술 한 잔 하러 가야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는 언제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재준이다.
"그래. 어디서 어떻게 할까?"
1 여기는 호텔이고 비싸니까 일단은 압구정으로 가자. 저녁도 먹어야 하니까."
+ 각자 차로 가야 하니까 '일단은'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미리 어디 갈지 확실히 정하고 가자. 괜히 길떠나서 헤매지 말고.
비교적 보수적이기도 하고 매사에 준비성이 있는 광렬은 좀 더 확실한 계획을 원했다.
1 그럼, 운동도 했으니까 우리 고기나 먹자. 무궁화로 가지 뭐."
+ 나는 그럼 가다가 집에 차 세워두고 그리로 갈게.

:::::::::::::::::

잠시 후 다시 만난 세 남자는 안면이 조금 있던 꽁지머리 지배인이 서비스로 조금 더 얹어준 생고기에 반주를 곁들여 식사한다. 오늘 오후 스케이트장에서 있었던 이야기, 최근에 사귀었거나 헤어졌던 여학생들 이야기, 군대가 면제되어 먼저 사회생활을 하는 동기 녀석들의 근황 등 비교적 가벼운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생고기 집 무궁화를 빠져나온 세 동창생은 찻길을 건너서 재준이와 창훈이 잘 알고 있다는 실내포장마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취기가 적당히 오른 세 사람이 길을 걷던 중 재준이 운을 띄웠다.
1 야. 우리 오랜만에 농구나 한게임 할까?
"농구 좋지."
+ 그런데 지금 여기서 농구를 어떻게 하냐?
재준의 즉흥적인 제안에 맞장구치는 창훈과는 달리, 현실성을 지적하는 광렬이다.
1 저기 농구하고 있는 세 명한테 한 게임 하자고 하면 되지~
넉살 좋은 재준이, 알아보기 힘든 그래피티(graffiti)가 가득한 벽을 향에 공을 쏘아대고 있는 세 명에게 다가간다.
1 어이 친구들~
"네? 왜요?"
조금은 불량해 보이는 세 녀석들에게 다가가 친구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재준의 넉살과 붙임성은 특별했다.
1 아름다운 밤인데 저희랑 만원빵 농구나 한게임 하시겠습니까?
"만원이요? 거 좋죠."

재준의 제안으로 가볍게 한밤의 3:3 농구를 하게 된 세 사람은, 술에 취한 탓에 내기로 건 만원을 당연하게도 털렸다. 하지만, 기분은 더욱 좋아져서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얼마 멀지 않은 실내 포장마차로 향했다.

by knulp | 2007/06/26 13:34 | 겨울(冬)-잠들지 못한 동면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epeeist.egloos.com/tb/34661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