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6월 26일
01. 낙방거사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깊이는 나락과도 같다. 우리는 행복을 모르고, 고향도 잃은, 이별마저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은 비정하고, 우리의 청춘은 젊지 않다. 우리에게는 국경이 없고, 아무런 한계도, 어떠한 보호도 없다 - 어린이 놀이터에서 이쪽으로 쫓겨난 탓인지, 이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를 경멸하는 사람들을 건네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모진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우리 마음이 의지할 수 있는 신을 마련해주지는 않았다. 우리는 신이 없는 세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과거도 없으며, 감사할 아무런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별 없는 세대』, 볼프강 보르헤르트 / 김주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中
1996년 어느 가을날 아침, 광렬(狂烈)은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오늘은 그에게 특별한 날이다. 딱히 만나야 할 사람이나 나가야 하는 약속장소는 없었지만, 지난 여름에 쳤던 행정고시 재경직 2차 시험의 합격 여부를 알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발표는 내일 아침 관보인 서울신문에 나겠지만, 통상 신림동 고시 학원가에서는 정식 발표의 하루 전날부터 합격자 명단이 떠돌아다닌다.
시험 전 유명 고시학원들에서 치렀던 2차 대비 모의고사마다 출중한 성적을 보였던 탓에 스타디 그룹 내에서도 신망과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김광렬의 합격에 대해서는 주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광렬 스스로는 꽤나 난해하던 한 문제에 집착하여 제한된 시험시간의 상당부분을 허비하는 어이없는 시간배분 실수를 한지라, 평균점수는 커트라인을 거뜬히 넘기고도 혹시 한 과목 과락으로 말미암아 어이없는 불합격이 될지도 모른다는 남모르는 두려움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이번 시험 결과에 큰 기대를 거는 모친이 있는 집안에서 학원으로 합격 문의전화를 하기에는 부담스러워, 무작정 집 밖으로 나선 것이다.
아파트 단지 앞 지하철 3호선 대치역 공중전화 부스에 멈춰선 광렬은 학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뚜~~~"
합격자 명단 확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험생은 광렬이 한 명뿐이 아니기에, 학원 전화는 계속해서 통화 중이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광렬은 수화기를 올려 전화를 끊은 후, 학원 전화번호를 다시 한번 누른다.
"네~ 태학관입니다."
학원 여직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받는다.
수많은 수험생을 상대하는 그녀는 광렬을 모르겠지만, 광렬은 전화 속의 목소리로 그 여직원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와 마주칠 때면 늘 상냥하게 웃어주고는 했었는데, 전화받는 태도도 친절하다고 생각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 네, 저…. 결.과.. 나.왔.습.니.까?
"네. 직군하고 수험번호가 어떻게 되지요?"
+ 재경직 175번 입니다..
"성함은요?"
+ 네. 김.광.렬. 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저… 죄송한데요. 제가 가지고 있는 명단에서는 찾을 수가 없네요. 팩스로 받았기 때문에 좀 흐릿하거든요? 혹시 모르니까 내일 신문공고를 한 번 더 확인해 주시겠어요?"
까다롭고 요구사항이 많은 고시생을 수없이 겪어왔을 여직원이지만, 합격이라는 천국과 불합격이라는 연옥(煉獄)의 갈림길에 홀로선 광렬을 대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동정심'마저 느껴진다.
+ 네..
"죄송합니다."
+ 아니요…. 감사합니다.
애써 밝게 대답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는 광렬의 손아귀에는 온 힘이 빠져버렸고, 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한참을 멍하게 서 있던 광렬은 여자친구 나영의 존재를 떠올렸고, 언제부터인가 삐죽이 밀려나와 있던 전화카드를 다시 밀어 넣고서 지난 3년 동안 천 번도 넘게 걸어댔던 나영의 방 전화번호를 익숙하게 누른다.
"뚜~~~"
신호가 간다.
"뚜~~~"
2주 전 쯤 전화상으로 다툰 후에 그동안 연락을 끊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난 3년간을 허물없이 사귀어온 베스트 프랜드라는 생각에 이르자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고 서 있는 광렬의 눈앞에는 나영의 얼굴이 온통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언제나처럼 경쾌한 그녀의 목소리다.
+ 나야~
= 나라니?
+ 나. 광렬이.
= 어.. 근데 아침부터 웬일이야? 공부하러 안 갔어?
원래부터 곰살맞은 적이 별로 없던 나양이지만, 오랜만에 건 전화치고는 유난히 퉁명스러운 목소리다.
+ 나. 시험결과 나왔어.
= 쳇~ 붙었지?
+ 아니. 떨어졌어.
= 거짓말. 놀리는 거면 죽어?
+ 아니야. 안됐어…
= 에이…. 장난치지 마.
+ 후후. 진짜 그렇게 되었네.
= 이 바보야.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왜 떨어졌어.
+ 나도 왜 떨어졌는지 잘 모르겠어. 아마 한 과목 과락이 났나 봐.
= 어떻게~ 이제 어떻게~
+ 몰라.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녀의 나무람이 싫기는커녕 정겨워진 광렬은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고 싶어졌다.
= 안돼.
+ 왜? 왜 안돼?
= 나 남자친구 생겼어.
+ 뭐? 남자친구는 무슨?
= 나는 뭐 일편단심 민들레인 줄 알아? 나도 애인이 생겼다구.
수화기 너머 그녀에게서 전해지는 충격적인 선언을 듣는 그의 마음은 왜 이리 차분해지는 걸까. 광렬은 마치 이런 상황을 미리부터 기대했었다는 듯 담담하게 되묻는다.
+ 그래? 뭐 하는 사람이야?
= 카대 졸업한 의사야. 경제학과 휴학하고 놀고먹는 고시생인 오빠보다 훨씬 바쁜 인턴인데 맨날 나 만나러 우리 동네까지 오고, 또 오빠처럼 길 막힌다고 운전하는 거 귀찮다고, 있는 차도 집에 두고 절레절레 걸어오는 경우 없고, 만날 때마다 맨날 집앞에까지 데려다 주는 매너있는 사람이야. 신사라고 할 수 있지.
+ 그래? 잘됐네. 알았어. 행·복. 해. 라. 둘 중의 하나라도 잘 풀려야지.
그렇게 짧은 통화를 끝냈다.
광렬은 작년에 2차 시험 유예가 되면서, 학교도 1년 휴학했기 때문에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결과가 어찌 났을지 모르는 스타디 그룹의 다른 멤버들에게 연락할 기분도 아니어서, 일단 어딘가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지하철에 올랐지만 열차 문이 스르륵 닫기자 말자 곧 후회하기 시작했다. 출근전쟁이 이미 지난 늦은 아침이라 텅 빈 지하철 안이지만, 가슴이 조여와서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대로 지하철 안에 남아 있다가는 산소부족으로 죽을 것 같았다. 살기 위해서는 회색빛 하늘이라도 볼 수 있는 지상으로 다시 나왔어야만 했다.
3호선 도곡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광렬이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신림동 학원가였다. 광장서적 앞에 웅성웅성 모여있는 사람 중에는 낯이 꽤 익은 얼굴들도 있었지만, 광렬은 고개를 푹 숙이고 수험번호를 확인한다. 그의 앞뒤에 있었던 스타디 그룹의 선배 동기들은 대부분이 합격한 것을 확인하자, 자존심 강한 광렬은 괜히 아는 사람들을 마주쳐서 위로를 받느라 어색해지기 전에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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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시내를 배회하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 발길이 닿은 곳은 나영이 살고 있는 신사동 미성 아파트 단지 앞이었다. 나영의 얼굴을 지금 당장 보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공중전화 앞에 선 광렬은 그녀의 방 전화번호를 누른다.
= 오빠야?
수화기 저쪽에서는 나영의 목소리가 쾌활하게 들려온다.
+ 응. 나야.
= 어머~ 난 또 우리 오빠인 줄 알았잖어.
+ 우.리.오.빠?
= 엉~~ 좀 있다가 오빠가 데리러 오거든. 요새는 마취과 인턴 돌아서 일찍 끝나.
+ 그래? 그럼 나 끝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우리 늦게라도 만날까?
= 기다리긴 왜? 기다리지 마. 나 늦을 거야.
+ 나…. 이따가 잠깐만이라도 만나면 안 될까?
= 안돼. 나 지금 빨리 화장해야 해. 끊어.
"뚝~"
나영을 만나기 전 한때 대/마/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적도 있던 광렬이었다. 원만했던 친구들과의 관계와는 달리, 주변의 여자들에게만은 마치 독재자인 양 원하는 모든 것을 요구하기도 했었다. 어떤 여자는 그런 그를 마초라고 부르기도 했었지만, 자신의 주변의 여자들에게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그도 상대에게 늘 옵션을 남겨 준다는 궤변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나 자기 방식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의 주변에 여자로 머무르려면 광렬 자신만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오만한 양/자/택/일/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3년 전 모든 것이 제멋대로인 나영을 만났을 때부터 그녀에게만은 독재자 광렬의 모든 원칙들이 뒤죽박죽 엉켜가기 시작했었다. 그녀는 야생마였던 것이다.
광렬은 나영의 방이 뻔히 보이는 공중전화 부스에까지 와서 아파트 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나오라고 호령하기는커녕, 그저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 달라고 사정하는 자신의 지금 처지를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절박했다. 그녀를 꼭 한번은 다시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그것도 바로 오늘.
지금 당장.
다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나영이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 나야. 나 집앞이야. 잠시만 나와봐.
= 안된다니까! 천하의 김광렬답지 않게 정말 왜 그러셔? 우리 오빠 곧 집앞으로 올 거야. 괜히 어색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자리 비켜줘.
+ 그럼 이따가 늦게 정류장 앞 자뎅에서 만나.
= 안돼. 그리고 나 빨리 화장해야 해. 끊어.
그녀의 쌀쌀맞은 목소리 사이사이에는 간간이 '톡톡톡' 분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무성의하게 한쪽 고개에 수화기를 끼고 손가락에 낀 분첩으로 반대쪽 뺨을 두드려대고 있을 나영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자,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톡톡톡' 분 소리가 그의 머리를 '쿵쿵쿵' 내려치는 해머 소리처럼 육중하게 울려온다.
어디를 얼마나 방황했을까?
한참 후 축 쳐진 어깨로 집으로 들어왔다. 시험 결과에 대해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부모와는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현관에서 큰 목소리로 간단히 인사한 광렬은 서둘러 제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털썩 누웠다가 잠시 후 몸을 돌린 광렬은 다시 나영의 방으로 전화를 건다. 12시도 넘었는데 그녀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들은 아까 만나서 지금까지 도대체 무얼 하고 있을까?'
어느새 고시에 불합격한 사실은 잊어버린 지 오래고, 나영에 대한 용서 못 할 분노에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광렬이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다이얼을 돌린 끝에 새벽녘에야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 나야.
= 어? 왜 아직 안 잤어?
+ 여태껏 뭐하고 돌아다녔어?
= 오빠가 남의 일에 무슨 상관이야?
+ 뭐라구? 남의 일? 뭐 이런 년이 다 있어?
= 뭐? 년? 야! 이 자식아!
+ 뭐? 이 자식?
= 그래. 이 자식
+ 너 말 다했어?
= 그래 어쩔래? 너가 먼데 새벽에 전화질이야?
+ ....
성깔 사나운 나영과 대화를 계속하려면 일단 그녀를 달래야만 했다.
+ 나영아.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 뭐야. 빨리 말해. 나 빨리 씻어야 해. 그리고 곧 우리 오빠 전화 올지도 몰라. 통화 대기 중 걸리는 거 싫어.
+ 그 사람 언제부터 만났어?
= 그게 뭐가 중요해?
+ 그냥 궁금해서 그래. 우린 이제 친구도 아니니?
= 흥. 친구? 오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해?
= 오빠가 나랑 스키장에 한번 같이 가줬어? 나 밤에 영어학원 끝날 때 한번 데리러 왔어? 희경이 남자친구처럼 리포트를 대신 써주거나, 아침에 집에서 학교까지 차를 태워준 적 있어? 에버랜드 장미축제, 튤립축제, 야간개장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빼고 마지막으로 데려간 게 도대체 언제야? 화이트데이라고 남들처럼 장미 백송이 꽃바구니를 제대로 한번 준비했어?
+ 나는…. 바. 뻤. 잔. 어..
그를 향한 원망을 1분 가까이 숨도 한번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내뱉는 나영에게, 잠시 망설이던 광렬은 곰처럼 느릿하게 대답한다.
= 참나~ 세상에 안 바쁜 남자 있는 줄 알아? 다들 오빠보다 더 바쁘고 잘난 사람들도 오빠 같지는 않어.
+ 그렇다고, 그새를 못 참아서 바람을 피웠냐?
= 바람? 하하하. 한 달에 한두 번 만나고, 자기 만나고 싶을 때 예정도 없이 전화나 해서 삼겹살이나 사먹자는 게 사귀는 거야? 나도 내년이면 더는 대학생도 아니고 결혼준비 해야겠어.
+ 그래서.. 의사 만나니까 그렇게 좋냐?
= 그래 좋다. 나도 의사 사모님 함 될 거다. 왜?
+ 알았어. 그래서 도대체 몇 달이나 되었는데?
= 석 달 좀 넘었어. 됐어?
+ 그럼 너희 키스도 했어?
= 정말 사람 유치하게 왜 이래?
약이 바짝 오른 광렬은 어떤 식으로든 나영의 속을 긁어 놓고 싶은 유치한 치기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 알았어. 축하해. 꼭 병원장 사모님 되거라. 그런데 너 지금 전화하는 그 바나나 모양 전화기 내가 사준 거 아냐?
= 그래서. 치사하게 되돌려 달라구?
+ 아니. 그거 언제 사준 건지 기억나니?
= 재작년 초가을에…. 오빠가 친구들이랑 경포대 MT 갔다 와서 보고 싶다고 우리 집까지 달려와서 사준 선물이잖어. 하긴…. 그러고 보면, 가끔은 예쁜 짓도 했었지.
나영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 하하. 예쁜 짓? 그때 사실 나 MT 간 거 아니다.
= 그래? 그럼 어디 갔었는데?
+ 옛날에 너 만나기 전에 놀던 여자애랑 둘이서 경포대로 주말여행 갔었다.
= 뭐? 이 걸레 같은 놈.
+ 사실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
= 그럼 왜 그랬어! 이 걸레 같은 자식아!
+ 뭐 걸레? 자식? 말 함부러 하지 마. 하여간, 너가 내게 그런 삶을 강요했어.
=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우리 사귄 지 3년이 넘었지만, 너야말로 내가 여행 가자고 할 때 한번이라도 따라 나서준 적 있어? 우리처럼 손잡고 뽀뽀만 하면서 3년 넘게 사귀는 커플이 어디 있어?
= 그래서 뭐. 뭐.
+ 사귄 지 1년이 넘었을 때 니가 그랬잖어. 그런 거 가지고 자꾸 싸우느니 차라리 너 모르게 다른데 가서 해결하라며?
= 야! 그렇다고 진짜 그러냐? 더러운 자식!
+ 글쎄,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나를 육체적으로 타락시킨 건 바로 너야. 나도 그전에는 적어도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지는 않았었다구. 생각 안 나? 그때 한강 고수부지에서 너가 그렇게 자꾸 괴롭힐 거라면 차라리 다른 여자랑 해결하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며칠 후 새벽에 걔한테 전화가 왔었어. 너랑 사귀는 건 어떠냐고 묻길래 사실대로 말했지. 열라 굶고 있다고…. 걔는 너가 여전히 내 애인인 줄 알지만, 그런 거 따위는 상관없이 나와 쿨하게 즐기고 싶다고 그랬는 걸? 아니, 걔는 자기가 진짜 애인이고, 너 따위는 껍데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 하여간, 난 걔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왠지 너가 더 보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그때마다 너네 집 앞에 찾아간 거야. 지난 1년 동안에는 내가 예정에도 없이 불쑥 너네 집앞으로 운전하고 가서 밖으로 나오라고 전화하던 때는 대부분 걔랑 만나고 난 후라고 보면 돼.
= 야. 이 개자식아!
그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는 동안 아무 말 없이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만 내던 나영이 벽력같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고, 광렬은 서둘러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전화 플러그도 뽑아 버렸다. 안 그래도 성질 급한 나영이 길길이 날뛰며 오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울 생각을 하니 답답하고 억울하던 마음이 조금 후련해진다. 하지만, 조금 후 새벽이면 배달될 조간신문에서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을 부모 생각에 다시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긴 하루였다.
피곤에 절은 광렬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든다.
# by | 2007/06/26 13:22 | 겨울(冬)-잠들지 못한 동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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